가능동 - 에니그마 커피
셋방을 전전했던 어린 시절, 가능동은 꽤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 중 하나였다. 앞쪽으론 쉴새없이 차량이 오가던 교차로, 뒤편으로 넓게 펼쳐진 미군기지 사이에 위치했던 그 때의 월세집은, 앞뒤로 꽉 막힌 압박감만큼 비좁았고, 새어나오지 못한 탁한 공기가 바닥으로 가라앉던 곳이었다. 고등학교가 가까웠던 덕분에 버스비는 아낄 수 있었지만, 교통비 몇 푼을 덜어냈다고 무겁게 짓누르는 현실이 그다지 가벼워지진 않았던 것 같다.
상황이 비교적 나아져 터전을 옮기고 난 후 가능동에 발길이 뜸해진건, 단순히 생활반경과 겹치지 않는단 이유도 있었지만, 오래전 기억을 굳이 되새김질 하고 싶지않았던 기저도 꽤 작용했던 것 같다. 애증이 담겨있을 법할 그 곳에 다시 발을 딛게 된건 대명관이라는 노포덕분이었는데, 어렸을 적 이 가게를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삶의 즐거움이 조금은 더 늘어나지 않았을까 싶을정도로 만족스러운 곳이긴 했다.
즐거운 식사 덕분인지, 오랜만에 거닐은 가능동 산책은 썩 즐거웠다. 산책길동안 둘러본 주위는 여전히 시간이 반 박자 느리게 흘러가는 것 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세세하게 살펴보면 생각보다 많은것이 변해가고 있었다. 이번에 발견한 카페인 에니그마 커피도, 그 변화 중 하나였을지 모르는 일이고.
우선 눈에 띄었던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의 새하얀 공간이었다. 왼편으론 작은 미용실, 오른편으로 몇 걸음만 걸으면 20년 가까이 터전을 지키고 있는 문구서점이 자리잡은 골목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매장이 카페였단 점도 꽤나 이목을 끌었을 법 한데, 이 가게는 연남동 골목카페를 잘라붙여낸 인상에 가까웠으니. 발걸음을 카페로 옮기는데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같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쇼윈도를 가득 채웠던 하얀빛이 형광등 불빛에서만 비롯되지 않았단 사실을 금새 알 수 있었다. 문구점에서 새로 산 도화지가 깔린듯한 벽을 비롯해서, 테이블과 몇몇 의자, 심지어 분재가 심어진 화분에 이르기까지 백색으로 칠해져있었는데, 하양이 아닌 쪽을 헤아리는 편이 차라리 더욱 간편했을 터이다. 노출콘크리트 인테리어로 대표되는, 무성의를 개성으로 포장한 요즘 시류와는 완전히 대치된 모습이었고, 덕분에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편하게 머무를마한 자리가 많지 않았던건 살짝 아쉬웠지만, 한정된 범위내에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고민한 흔적은 느껴졌던 것 같다.
메뉴는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면서도, 여느 커피집에서 팔리는 기본 메뉴들은 충실히 갖춘 모양새였다. 늘상 그랬듯이 첫 방문한 카페에선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 했는데, 두 번째 단락에 나열된 아인슈페너가 왠지 이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인것처럼 느껴졌기에, 이번에는 예외로 아인슈페너를 마셔보게 되었다.
음료를 주문하면서 살짝 물어보았는데, 이 카페는 4월 3일경에 오픈했다고. 방문했을 당시엔 오픈한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던 셈이다.
커피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편은 아니고, 나는 어디까지나 흔한 소비자 A에 불과한지라 맛에 대해선 말을 얹긴 어렵긴 하다.
맛있다/그렇지 않다의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간단하게 끝낼수도 있긴 했지만, 이번 음료의 경우엔 좋은 듯 하면서도 미묘한 느낌이긴 했다.
아인슈패너는 아메리카노 위에 휘핑크림이 올라간 에스프레스 음료로, 섞지 않고 마셨을때가 다양한 맛을 느끼기에 좋단 관점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시음했는데, 휘핑크림은 느끼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달달한게 나쁘진 않았다.
미묘했던건 휘핑크림 아래에 담긴 아메리카노였는데, 휘핑크림의 달달함을 받쳐주기엔 농도가 연해서 앞서 맛보았던 휘핑크림에 커피맛이 묻혀진듯한 인상이었다. 커피 자체가 나빴던건 아닌데 아인슈패너로서는 밸런스가 기울어진 구성이었고, 크림과 에스프레소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아닌, 크림에 의해 일반적으로 끌려다니는 느낌에 가까웠다. 잔을 입에 댈 때마다 달라져가는 맛을 느끼고 싶었던 나로선 조금은 아쉽긴 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았다. 가게 점주님도 이런저런 노력과 시도를 하고 있단것이 느껴졌고, 골목의 분위기와 다른 인상에 느껴졌던 이질감도, 막상 가게 안에선 금새 쓸려나갔던 것 같다. 동행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음료를 기다리는 기대감도 즐거운 경험이었고, 무엇보다도 멜론 가요 탑100을 플레이 리스트로 재생하지 않았던 점에서 플러스 점수를 더 후하게 줄 수 있을 것 같다.(반쯤진담)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더 들러보고 싶긴하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