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고, 기울어지는 계절에 대해.

가을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마음속으로 풍경이 그려지는 마법같은 단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하늘은 기울며 땅으로 잠겨들고 콘크리트 바닥에는 수북히 쌓인 나뭇잎이 더욱 붉게 빛나는,
그런 장면이 그려지는 멋진 단어.
가을은 왜 가을인걸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다. 한자로는 秋, 영어로는 Autumn 혹은 Fall로 줄곧 말하곤 하지만,
서른 번이 부쩍 넘는 횟수만큼 가을을 맞이하면서도, 그 유래에 대해선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겨우 떠올린 생각은, 가고 기울어지기에 가을인걸까 하는,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쓸쓸한 상상이었다.
생각해보면 가을은, 풍성함이 지나간 자리에 쓸쓸함이 흩뿌려진 그런 계절이었으니까.

가을이라는 말에 유독 건조하면서도 부슥거리는 풍경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건,
사라져가는 것에 더욱 마음을 두는 나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2년 전 유독 힘들었던 그 해 가을이 마음속에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등떠밀듯 카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듯 겨우겨우 버텨야 했던 2년전의 그 기억이.
평소라면 둘러볼 일이 그다지 없었을 익선동과 대학로 인근의 캠퍼스 거리는 정말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나는 그 풍경을 누릴 자격이 없는 것 마냥 살아왔었다.
서둘러 일터로 가야했던 초조한 나의 모습,
그리고 일을 마치고 길에 널부러진 낙엽을 즈려밟으며 터덜터덜 돌아가야 했던 기억이
그 해의 가을이 나에게 남긴 크나큰 상흔이었다.
나는 Fall이라는 단어처럼, 떨어지고 있었던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풍성했던 순간 너머, 순식간에 빈곤해지는 시기를 절감했던 때가 그 해의 가을이었고,
가고 기울어진다는 것은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란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도 그 해의 가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옳은 선택을 했던걸까? 라고 스스로 되물었을때 확답은 할 수 없을지언정,
기울어진 계절 너머에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인내하였던건 분명하다고.
그리고 가을은 지나간 흔적 그 자체로 멈추는 것이 아닌, 그 이후에 피어날 푸르름을 바라볼 수 있는 계절이 되었다고,
가까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올해의 가을은 유독 그 끝이 늦어지고 있단게 느껴진다. 작년 이맘때에는 아침마다 차가운 공기속을 거닐었던 것 같은데,
아직 하늘은 높고, 햇살도 적당하고, 가로수에 심어진 나무들도 풍성하기만 하다.
소중한 사람과 거리를 거닐으며 알록달록 빛나는 세상을 좀 더 눈에 담을 수 있게 된건 참으로 기쁜 일이지만,
올해의 가을이 기울어지고 겨울이 찾아오면, 얼마나 혹독한 추위가 다가올지 걱정이 되는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가을에 대한 단상을 남겨보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가을을 더욱 오래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같았다.
지나간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후회가 동반되는 반추를 되풀이 할지언정,
최소한 그 심상을 글의 형태로 남기는 일련의 행동이,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풍경을 더욱 소중히 거머쥘 수 있는,
나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길 믿으며, 애써 그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https://seiji-takahashi.bandcamp.com/track/at-first-sight
at first sight, by Seiji Takahashi
from the album str012 снег
seiji-takahashi.bandcamp.com
생각해보면, 가을은 그저 꺼져가는 과정만은 아니었다.
쓸쓸하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세이지 타카하시님의 음악이 더욱 어울리는 계절.
날을 거듭하며 서서히 추워지는 만큼,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가 더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계절.
모든것이 하얀 풍경으로 변하기 전에, 세상이 가장 알록달록 칠해진 그런 계절.
그리고 이런 심상을 마음에 더욱 새길 수 있는, 그런 계절.
앞으로 맞이할 가을이 예전과 완전히 같을 순 없겠지만, 지나간 흔적 위로 새 싹이 돋아날 것을 믿는,
늘 그런 계절로 남아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