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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음반

Papillon

by offscape 2024. 5. 4.



0. 나비는 피어 오른다. 꽃잎같은 두 날개에 몸을 싣고.

1. 일렉트로니카 컴필레이션 음반 「Papillon」의 티저영상을 처음 보았을때의 기쁨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bunkai-kei 레이블 & fusz의 계보를 이어주었다는 감사함도 있었지만, 전자음악으로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의 열정이 끝나지 않았단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잔잔한 풍경의 소중함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으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음은, 그들의 의지가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butterfly effect라는 관용어도 널리 쓰일정도로, 작은 나비의 날개짓은 고요할지언정, 그 앞에 펼쳐질 변화는 폭풍우를 불러올 수 있을정도로 무한하다. 그러나 나비의 날개짓이 그 자체로 빛나는건 폭풍우를 일으켰는가 아닌가보다는, 나비가 드넓은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며 그의 세상이 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음반의 제목이 나비 「Papillon」인 이유도, 그 잔잔한 울림이 누군가에게 깊게 스며들 수 있기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창작자들의 마음이 그랬던 것 처럼.

3. 비상(飛翔)은 땅이라는 물리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땅이라는 터전을 잃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부푼 기대감으로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지만, 더 넓은 세상을 향할 수록 내가 머물렀던 근간에서 멀어져가는 쓸쓸한 감정은 지울 수 없다. leaving home은 그럼에도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방랑자의 발걸음 같아서, 정적인 선율로 빚어진 공허한 감정을 마음에 새긴 것 같았다.

4. 땅에서 멀어진다는건 땅에 있었기에 피할 수 있었던 풍평을 그대로 뒤집어 써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은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낸 그늘에 비바람을 피할수도 없고, 몰아치는 돌풍을 가려줄 가림막도 없다. 무한한 가능성이란건 환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갈라진 마음 사이로, 오갈 곳 없는 울분이 스며든다. 날개짓은 상처입는 과정에 불과했다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허탈해하며, 이 끝없는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애원을 덤덤하게 읊는건,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슬픔이란 이기는 것이 아닌, 끌어안고 가야 할 나 자신의 일부이기에.

5. 나비는 그렇게 풍파를 뚫으며 마음 속 빛났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번데기 속에서 바라본 하늘은, 그토록 날고 싶어했던 청금석 Lazurite처럼 푸르른 풍경이었음을. 낡은 영사기의 필름처럼 노이즈 낀 기억으로 뒤덮였을지언정, 동경하던 감정 만큼은 결코 뒤덮힐 수 없다고. 추억Reminiscence은 인생 사이에 끼워진 붉은 책갈피마냥 빛나고 있었다. 언제든 다시 기억해달라는 듯이. 그것이 잿빛 폭풍속에서도 나비가 빛나는 존재로서 날아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 처럼.

6. 그럼에도,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고, 나의 유한함을 견뎌줄 인내심이 없다는 듯 세상은 나를 제치고 뻗어나간다. 내가 날아오른 궤적으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나간 세월을 회고하며 butterfly effect는 다시한번 쓸쓸히 변주된다. 그럼에도 내가 남긴 작은 씨앗이, 또 다른 존재에게 푸르른 풍경을 새기게 해주고, 빛났던 순간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책갈피가 되길 바라며.


0. 그리고 다시, 나비는 피어 오른다. 꽃잎같은 두 날개에 몸을 싣고.